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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진의 청년사역 연구/한국교회사 공부

한국교회사 3. 신사참배와 친일

by 거룩한나그네 2020. 4. 28.

신사참배와 기독교 회복운동

1.시대배경

일제는 한국에서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세계적 경제공항이 발생하는 등 

국내외적 위기에 부딪히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군사적 파쇼체제로 전환하고 

만주침략, 상해침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등을 도발했다.

이러한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동원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물적, 인적 수탈과 함께 민족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함.(한국기독교의 역사)

“동화정책”을 기본방침으로 했다.그래서 황국신민화정책을 시행함.

이런 위한 방안으로 신사참배와 궁성(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들을 강요함.

내선일체론을 내세움 : 한국민족은 일본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민족 속의 일부이며, 흥아적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란 것이다.

 

2) 신도란?

일본에서  시행한 신도와 신사참배 —> 한국으로 가져옴.

종교단체법을 통한 종교통제와 국가통제 시스템

1898년부터 제정하려던 종교단체법이 오랜 시간의 시도를 통해 1939년 제74회 제국의회에서 통과 됨.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룬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신격화한 천황제에서 국민사상의 통일 원리를 찾았으며,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타종교를 억압하고 신도를 국교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이 일자 신사와 종교의 분리라는 기만적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신사는 국가교화기관으로서 제종교위에 군림하고 제 종교는 국가신도체제에 위반되지 않는 선에서 

존립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정리)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신으로 여기는 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되었고. 지배 통치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 신도가 국교화 —> 신사신도=국가의 제사 —> 종교적 절대우위를 부여..타종교를 지배 통제하게 됨. 일본의 국가신도는 천황중심주의와 이를 옹호하기 위한 무력주의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결부시켜 침략정책 수행과 식민지 지배에 이용함.

일본에서 오랫동안 시도되고, 국가를 통제하게 된 방식을 한국으로 가져와 한국에서도 시행하려고 함.

동화정책의 기본구상이면서, 장기적인 지배를 위한 정신개조의 방식이었다.

이런 정책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이 <기독교>였다.

 

일제는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1)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 종교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 조화 공존할 수 없음을 알았다.

2) 한국교회가 민족운동과 연계된 배일적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3)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매개로 그들과 영국, 미국 등 서구제국과 연결되어 있어 강압적 통제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집요하게 두 가지를 시행하였다.

1)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사이의 유대관계를 단절시키려 했다

2) 한국교회를 일본 기독교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신사참배를 빌미로 이 두가지를 함께 이루어 나갔다.

1920년 일제는 이른바 ‘조선적 기독교’ 수립을 표방한 한국 교인들의 자생적 반선교사운동을 끌어들이고,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거부를 빌미로 기독교 학교를 폐쇄하거나 선교사가 학교에서 손을 떼게 했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 분열공작 결과 선교사들의 교육, 의료 선교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대부분 선교부가 교육사업에서 철수함. 1940년에는 탄압을 받아 대부분 기독교 병원도 폐쇄되었다. 1940년 10월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떠나게 된다.

 

2. 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강요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가는 1938년이다.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의 대두와 함께 신사참배가 정책차원에서 다시 강요되었다.

 

1) 이런 강요가 가장 집중된 곳은 교육계였다. 충성심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일환으로서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에 순응하지 않았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논리..

 

2) 1930년대에 일제는 신사중심의 이른바 황국신민화를 위한 정신개조운동을 강화하고

일반인에 대해서도 신사참배와 행사참여를 적극 장려했다.

1936년 8월..신사에 대한 공적 지원을 제도화.

‘1면 1신사’ 정책을 수립하여 산간벽지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건립하고 일반일에게까지 참배를 강요함

일제는 파출소, 주재소 등 관공서나 학교에 신궁대마를 넣어두는 간이신사인 가미다나를 설치했고

일반민가에까지 신궁대마를 강매하여 가미다나를 설치케 하고 아침마다 이에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3)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문제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15년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다.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고 결의한다.

그리고 이런 의견을 총독부와 교섭한다. 

1935년에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 교장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발생함.

평남 안주노회 “ 학교의 문을 닫을지라도 교리에 위반되는 참배를 할 수 없다.”

북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대체로 거부하는 입장.

그러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 신앙양심에 위배되므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과

‘신사참배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일제당국이 애국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므로 학교를 유지하고 기독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할 밖에 없다’는 의견으로 대립함.

남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반대입장을 표명함.

 

4) 신사참배 결의 

천주교..1930년대 들어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에 불과하다는 일제의 성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교리를 수정하면서 신사참배를 허용함.

감리교회..1936년. 총리사 양주삼이 총독부 초청 좌담회 참석후 일제의 입장을 수용함.

1938년 9월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이란 성명서를 발표함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함

경찰까지 동원해서 개개의 교회로부터 노회, 총회에가지 압력을 넣어 신사참배 결의를 강제함

여름에 경찰이 각지 교회에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이냐 종교지상이냐?란 질문서를 보내 그 답변에 따라 집회를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함.

총회전에 경찰서장이 노회대표들에게 1)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을 지킬 것 3) 앞의 두가지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함. 이에 불응하면 검속, 투옥하도록 했다.

총회 전일에 친일적 총대들을 포섭하여 이 안에 대한 제안,동의,재청자를 미리 선정하고

총대 선교사들을 경찰서로 불러 이에 관여하지 말도록 요구함.

장로회 총회는 100여명의 정사복 경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불법적으로 신사참배 결의안을 통과시킴.

 

5) 기독교계의 훼절과 수난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는 이후 일제의 전쟁 협력의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친일적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와 민족을 등지고서라도 일제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입증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 변질…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교회가 그 본질까지 변질되어 일본의 정책에 충실히 따르는 일종의 교화기관이 됨.
- 구약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없애기 위하여 구약을 폐기하기로 함. 

안식교,성결교등 미국적 배경의 군소교단 해산
- 황민화를 위한 목사 재교육을 실시함
- 부일협력…전시물자 동원..인력동원..애국기 헌납..

한국기독교의 역사2 p313.(316)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실천요목

6)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 (역사2 331)

두가지 방향…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 /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

첫째.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일제당국이나 영향력있는 기관, 인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것을 청원함. 

대표적 인물..박관준 장로 (안이숙) ..계속 청원운동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순교를 각오하고,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는 일본제국주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반대, 국교를 신도에서 기독교로 할 것, 신사참배 강요등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것등의 내용을 담은 경고서를 단상을 향해 투척함.

현장에서 체포, 평양으로 회송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름.

“청원운동은 당시 일제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고, 

일제의 권력구조를 인정한 체제 내 운동이라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둘째..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결속을 강화했다.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이주원, 주남선, 한상동,

전라남도의 손양원, 만주지역의 박의홈 헌트등이었다.

점차 지역간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지역 서북지역 만주 봉천 지역 사이에 거부운동을 위한 교류가 있었다.

“신사참배를 죽어도 거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것, 세속화되어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것, 신앙동지들을 확보하여 신령한 교회 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한상동등의 거부운동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신사불참배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를 도모할 것, 가정예배및 

가장 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며,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이는 대략 2천명에 달하고..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아직 연구의 부진으로 그 명단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킴..

일본적 체제와 민족말살전책에 저항한 민족사적 의미도 크다.

 

6) 해방후 한국기독교는?

해방과 기독교의 과제는?

무너진 교회 조직을 재건하고,

훼손된 신앙을 회복하며

교회안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

—> 친일을 청산해야 하는 과제, 훼절한 신앙인, 배교한 신앙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정치적인 측면과 신앙적인 면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

 

친일청산의 문제..반민특위의 무력화로 인해 실패

신앙의 회복.

출옥성도들의 5대원칙..

-신사참배를 행한 목사에게 최소 2개월 동안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

자숙안을 반대함.

- 교회를 지키지 위해 애쓴 사람들도 감옥생활 한 사람들만큼 고생했고 

도피했거나 은둔했던 사람보다는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신사참배와 관련된 회개와 책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함.

—> 수적으로 많고, 교권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음.

그래서 이들의 의견을 따르게 됨. 회개를 외친 사람들을 소수가 되고, 바리새 주의라를 오명을 씌움

(초대교회. 로마의 박해로 인한 배교 후 교회는 어떻게?)

 

결론>

친일과 신사참배 문제를 기독교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

교회제도의 유지 차원에서 해석하는 태도는 이후의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됨.

이런 기반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삼종은 그의 책 <박삼종의 교회생각>에서 한국교회의 뿌리로 신사참배체제를 든다.

신사참배가 만든 생각과 문화가 한국교회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어떤 식으로 그 체제에 젖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생각의 

단초들을 제공한다.

 

신사참배 체제

먼저 '제국적 불일치구조 속에서 군국주의 군사 동원 체제인 일제에 교회가 협조하면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말하는 것이 제한된 

신앙의 이원론 구조가 깊숙이 교회 안에 체질화되고 내면화되었다한국교회의 

이원론은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것으로 단지 서구에서 수입된 기독교 세계관이나 이론들로만 극복될  있는 문제가 아니다우리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체제' 이해와 극복 과정이 

필요하다. 

 

 번째로 제국적 일치의 구조 속에서 국가 권력과 노골적으로 결합한 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국가주의에 순응한 대가로 국가 권력이라는 외부의 힘으로 교회 내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는 '힘을 추구하는 권력의 악순환' 형성되었다. 

 

 번째로 제국적 불일치와 일치 속에서 국가주의와 타협해 신앙의 동력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신앙은 개인의 입신양명과 물질 추구를 합리화하는 체계로 변질한다특히 미국제 천민자본주의의 종교판인 미국제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철저히 한국교회는 종교 시장화되면서 

성장주의맘몬주의가 노골적으로 추구된다. 

 

 번째로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교단들과 달리 저항했던 무리는 점차 '신사참배 체제' 반성 없이 물들면서 서서히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보존했던 신앙 동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있다이는 일부는 신앙적 우월주의와 분리주의적 색채 때문이기도 하고신사참배에 관철된 역사적인 구조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성찰대안 제시가 부족했던 탓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로 국가주의와 타협한 기독교 국가 체제 종교로서 한국교회는 반공 이념개발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한국에서 자본이 성장하는 방식과 똑같이 성장한다하나님께 빚진 교회가 아니라 자본에 빚진 교회는 토지와 건물에 투자하고   건물과  넓은 토지를 찾아 이전하는 십일조와 헌금으로 대출 빚을 열심히 갚는 자본 회전 체계의 충직한 일부가 되었다. 

 

여섯 번째로 국가 권력과 밀착된 한국교회는 기득권화하면서 대중적인 공감대를 상실하고 있다이는 직접적으로 90년대 이후의 선교 위기로 찾아왔다대중 동원 운동의 한계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한국이나 복상이나 성서한국 등의 대응으로 이어졌다그러나 신사참배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한국교회는 '한경직' 신사참배 체제로 다시 읽어야 한다. 

 

 

 

 

신사참배와 배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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